십자로 | 프롤로그

작가 Oldboy101 | ChatGPT의 도움으로 작성

비는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자정을 막 넘기기 직전의 도시 위로, 젖은 어둠이 얇게 번져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늦은 밤의 도로들은 텅 빈 혈관처럼 검게 뻗어 나가다
한 점에서 맞물려
젖은 십자로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무너져 있었다.

신호등은 아직도 제 순서를 지키고 있었다.
붉은빛이 켜졌다가 사라지고,
노란빛이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푸른빛이 빗물 어린 아스팔트 위로 번졌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미 아무 질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서쪽으로 뻗은 도로 위에는 버스가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
차체 옆면이 깊게 찌그러진 채 옆에서 들이받힌 충격에 밀려나
끝내 버스 정류장을 짓이겨 놓고 멈춘 상태였다.

무너진 지붕의 프레임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젖은 차체 옆에 엉겨 붙어 있었다.

그 뒤로는 푸드트럭이 버스 후미를 스치듯 받고 멈춰 있었다.
급하게 미끄러져 들어온 흔적이 노면 위에 길게 남아 있었고,
앞범퍼 일부와 한쪽 조명만이 부서진 채
다른 차량들보다 덜 망가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고의 중심에 가장 가까운 곳,
교차로 한복판에서 서쪽 차선 쪽으로 비틀려 밀려난 배송 트럭은
운전석 쪽으로 뒤집힌 채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버스의 옆면을 정면으로 파고든 충격이
차체 앞부분 전체를 무너뜨려 놓았고,
여러 번 부딪히며 튕겨 나간 흔적들이
젖은 도로 위에 검은 상처처럼 어지럽게 긁혀 있었다.

네 대의 차량 가운데
가장 심하게 망가진 건 그 트럭이었다.

동쪽 도로 끝, 인도 턱 가까이에는
검은 SUV 한 대가 따로 밀려나 있었다.

배송 트럭이 스치고 지나간 듯 뒤범퍼 한쪽이 벗겨져 있었고,
차량은 교차로를 가까스로 빠져나간 마지막 자세 그대로
도로 가장자리에 멈춰 있었다.

빗물에 젖은 차체 위로 가로등 불빛이 차갑게 미끄러졌다.

위에서 보면
충돌은 이미 지나간 일이었지만,
그 자리에 남겨진 것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밀려든 네 대의 차량과
흩어진 유리, 끊긴 타이어 자국, 무너진 정류장 잔해가
그 젖은 십자로 위에
한순간의 폭력을 오래된 흔적처럼 붙들어 두고 있었다.

도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만 조용히 내려
부서진 금속과 유리 위를 적시고,
남아 있는 불빛들을 더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를 길게 찢었다.

남쪽 도로에서 승용차 두 대가 젖은 십자로를 북쪽으로 가로질러 질주해 갔다.
바로 뒤를 경찰 순찰차가 따라붙었다. 붉고 푸른 불빛이 부서진 차체와 빗물 위를 훑고 지나간 뒤,
추격은 그대로 북쪽 도로 끝으로 멀어졌다.

SUV 조수석 문이 열리며 이시후가 급히 밖으로 내려섰다.
구김이 간 셔츠 위쪽 단추 두어 개가 풀려 있었고, 넥타이는 이미 풀어 둔 채 보이지 않았다.
술기운이 아직 덜 가신 듯 얼굴에는 옅은 붉은기가 남아 있었다.
한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긴급 신고 통화는 아직 이어지고 있었다.

시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방금 북쪽으로 질주해 간 추격전 쪽을 바라봤다.
놀람과 짜증이 한꺼번에 얼굴에 남아 있었지만, 흐트러진 기색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대편, 운전석 쪽에서 내린 박시연은 문짝을 짚고 잠깐 숨을 고르더니 왼팔을 한번 눌렀다.
집에 있다가 급히 나온 듯 편한 차림 위에 걸친 겉옷 자락이 비에 조금 젖어 있었다.
가벼운 통증이 스친 듯 미간이 잠깐 좁혀졌지만, 그녀의 시선은 추격전 쪽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뒤집힌 배송 트럭.
무너진 버스 정류장.
그리고 그 앞을 비스듬히 막고 선 버스.

시연의 눈은 그 셋을 차례로 훑고는 거의 곧바로 정류장 쪽에 멈췄다.
차들이 어떻게 부딪혔는지보다, 그 안에 누가 있었는지를 먼저 헤아리는 사람처럼.

둘 사이에는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익숙한 호흡이 있었다.

푸드트럭 쪽에서도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내려왔다.

박성구는 문을 닫자마자 본능적으로 북쪽 도로 쪽을 한번 바라봤다.
한성숙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곧바로 성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숙의 눈이 성구의 얼굴과 어깨, 팔 쪽을 재빨리 훑고 지나갔다.
젖은 소매 끝을 한번 붙잡았다가, 다친 데가 없는 걸 확인하듯 곧 놓았다.
성구도 짧게 숨을 고르며 성숙을 한번 살폈다.

둘은 잠깐 눈을 맞췄다.
서로 다치지 않았다는 걸 그 짧은 사이에 확인한 듯, 더 머뭇거리지 않고 동시에 버스 정류장 쪽을 바라봤다.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처럼, 말보다 먼저 좋지 않은 예감이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운전석 쪽으로 넘어간 트럭 안에서,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조수석 쪽으로 기어오르듯 빠져나오고 있었다.

신서준이었다. 등에 백팩을 멘 채였다.
아직 학생 티가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한쪽 다리를 제대로 딛지 못했다.

트럭에서 겨우 몸을 빼낸 서준은 고개를 들었다가 SUV 앞에 서 있는 시후와 시연을 봤다.
그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짧은 정적.

서준의 눈빛에 스친 건 통증보다 먼저 올라온 공포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반걸음 물러섰고,
이내 몸을 틀어 절뚝이며 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시후의 몸이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버스 쪽에서 들려온 둔탁한 충격음이 시선을 잡아챘다.

창문 안쪽에서 젊은 남자가 손바닥으로 유리를 거칠게 내리치고 있었다.

문영제였다.

피로 젖은 얼굴 한쪽이 창문 가까이 들이밀려 있었고,
왼팔은 어색하게 꺾인 채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영제는 뭐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빗소리와 유리 너머에 막혀 말은 들리지 않았다.

성구와 성숙은 이미 버스 앞쪽을 돌아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한 뒤였다.
시후와 시연도 서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곧장 버스 쪽으로 향했다.

시연은 달리다 말고 한 번 뒤집힌 트럭 쪽을 돌아봤지만, 곧 시선을 거뒀다.
지금 먼저 봐야 할 건 다른 곳이었다.

버스 안, 뒤쪽 좌석에 김보영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지 못한 채 창밖만 보고 있었다.
시선이 묶인 곳에는 짓눌린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무너진 프레임, 깨진 유리, 비에 젖은 잔해들이 버스 창문 너머로 뒤엉켜 보였다.

보영의 얼굴에는 표정이 잘 잡히지 않았다.
놀란 건 분명했지만,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먼저 굳어 버린 듯했다.
젊은 얼굴 위로 그 나이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혼란과 공포, 확인하고 싶지 않은 예감이 한꺼번에 밀려와도, 
그녀는 눈을 돌리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창문을 두드리던 영제가 비틀거리며 그녀 쪽으로 돌아왔다.
숨이 가빴다. 피가 턱선을 타고 내려와 목으로 번지고 있었다.

영제는 보영 옆 좌석 손잡이를 붙들고 가까스로 몸을 세웠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정하지 못한 채, 보영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지금껏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굳어 있는 보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영제의 얼굴에도 후회와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졌다.

그는 보영 곁에 선 채, 그녀와 같은 방향으로 창밖을 봤다.
무너진 버스 정류장.

뒤집힌 배송 트럭 안에서는 이진오가 운전석 쪽으로 기울어진 차체에 반쯤 눌리다시피 걸쳐진 채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충격으로 부서진 앞유리와 운전석 쪽 창문 조각들이 얼굴 옆에 흩어져 있었다.

이마와 뺨에 흘러내린 피에 젖은 얼굴은 고요했다.
열아홉의 여린 선 위로는 일찍 단단해진 그림자가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핏기 없이 잠든 듯한 그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살아 있는 사람보다 멈춘 사람에 더 가까워 보였다.

잠에서 깨어나듯, 진오는 감긴 눈꺼풀을 서서히 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숨.
다시 숨.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그 순간, 기억과 현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진오의 시선이 다급하게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버스가 밀려 들어간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차체가 가리고 있어, 정류장 안쪽이 어떻게 됐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진오의 입에서 짧게 숨이 샜다.
그는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꼬여 버린 안전벨트가 가슴과 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진오는 이를 악물고 벨트를 잡아당겼다.

오른팔의 고통이 쑤시듯 울렸다.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아픈 오른쪽 다리를 억지로 밀어 보았지만, 통증이 곧바로 치고 올라왔다.

분노와 공포, 통증과 초조함이 한꺼번에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의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진오
처음이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이런 걸 바란 건.

신이 진짜 존재하기를…

지금만큼은.
이번만큼은.

내 삶에
좀 끼어들어 줬으면…

Leave A Comment

All fields marked with an asterisk (*) are required